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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 연기
fog  / smoke


이정은 (전시기획자)

안개가 드리워지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으로부터

작은 물방울 입자들이 공기 중에 부유하면서 안개가 몸을 에워싸면 위치와 방향 감각을 상실한다. 불에 타 연소되면서 연기가 몽글한 형태로 피어오르면서 눈앞을 가린다. 불안의 감정에 휩싸여 본 사람이라면 안개나 연기와 같은 뿌연 물체가 나를 둘러싸듯 막막하고 낯선 그 느낌을 안다. 안개와 연기는 그 자체로도 물질적으로 불안정하지만, 전방의 시야를 가리고 주변을 명확히 인지하지 못하게 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알다시피 불안은 특정한 대상이 없거나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상태에서 막연하게 다가오는 불쾌한 마음의 상태이다. 나를 에워싼 축축하고 매캐한 물성이 주변의 식별을 방해하고 인지 감각을 떨어뜨리면 그때부터 실체 없는 두려움은 실질적인 힘으로 나를 급습해 온다.

윤대희는 회화와 드로잉을 통해 불안이라는 감정에 대해 지속적으로 탐구해 왔다. 이번 전시<안개/연기>에서도 그 관심은 이어진다. 다만 이전 작업에서는 작가 스스로가 느끼는 불안을 표현하거나 그것을 이미지화하는 데 집중했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불안의 감정 자체에 몰두하기보다 그것이 개인과 사회적 층위에서 어떤 심리 기제로 작동하는지에 대해 포괄적으로 접근하는 데 더 관심을 두고 있다. 그는 일상에서 (무)의식적으로 형성된 사회문화적 공통 양식이나 행동들을 관찰하고, 그 기저에 자리하고 있는 불안의 심리와 공허한 정서를 화면에 재현한다. 또한 그것으로부터 파생된 사유와 여타의 감각 및 정서들을 회화와 드로잉으로 작업하였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회화와 드로잉을 각기 다른 상황에서 사용하였다. 회화는 주로 실제 현실에서 타인들이 만들어낸 불안의 흔적들을 발견하고 관찰한 것을 기록할 때에 사용하고, 선적인 것이 두드러지는 드로잉은 현실에서 파생된 사유를 작가 자신의 상상으로 당겨오거나 본인의 경험과 느낌을 드러낼 때 주로 사용하였다. 이처럼 작가는 관찰에서 사유로, 현실에서 상상으로 이행하면서 회화와 드로잉을 교차시키고 다양한 경로로 주제의 폭을 넓히고 있다.

전시장에 들어서서 가장 처음 볼 수 있는 작업 <mound>(2019)는 저 멀리 언덕 위에 인물 동상이 덩그러니 서 있는 풍경이다. 누구의 동상인지 알 수 없지만, 공을 세운 역사적인 인물이거나 종교 지도자이거나, 혹은 지역 공동체의 자랑스러운 향토 인물을 기리기 위한 기념 동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윤대희에게 이런 기념 동상은 사람들의 불안이 주조해 낸 형상, 즉 확신의 매개물을 만들어 불안의 심리를 해소하려는 행위의 산물일 뿐이다. 여기에서 기념비는 공동체의 이상이 온전히 투사된 대상이기보다는, 공동체의 자부심과 통합이라는 가상의 믿음을 제공하는 대리물인 셈이다. 그의 화면에는 기념비 외에도 불상, 소원탑, 기도 등의 물리적 대상이나 행위들이 등장한다. <믿음의 돌>(2021)에서는 하나의 종교로 성립된 절대적인 믿음의 구현체인 불상이 등장하고, <큰 믿음>(2017)에는 익명의 사람들이 소원을 빌면서 쌓은 돌탑들을 화면에 담았다. <촛불>(2021)에 그려진 바위 밑에 타다 남은 초는 무명인이 남긴 기도의 흔적을 보여준다. 이들 매개물들을 통해 작가는 인간의 “궁극적인 욕망”과 불안의 감정, 그리고 “믿음과 소망이라는 맹목적인 행동”으로 이어지는 심리적 기제를 회화의 서사로 구성한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이러한 사회문화적 양식들과 행위들, 공적 영역의 상징물들을 불안, 모호, 공허 등의 부정적인 정서와 결합시키고, 이를 초라하고 실패한 풍경으로 재현한다는 점이다. 기념비는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합의의 구성물이며, 돌을 쌓은 소원탑은 소망과 기대를 담은 희망의 집적물이다. 다수의 바람과 공감이라는 긍정의 메시지가 무색하게도, 윤대희가 기념비를 비롯한 이들 형상들에 주목하여 만들어 내는 서사는 사람들의 불안, 불완전한 존재와 결핍, 실체의 부재 등의 부정적인 것과 그 정서와 관련된다. 또한 이는 그의 화면에서 본래의 상징과 의미를 전달하는 데 실패하고 그 기능에 닿지 못하는 초라하고 쓸쓸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래서 그의 화면에서 동상은 처연하게 덩그러니 서 있고(<mound>), 불상은 머리가 잘려 형태가 망가진 상태로 관리되지 않은 채 그냥 놓여 있다(<믿음의 돌>). 이렇게 그는 “욕망의 끝에 다다르지 못한 잔여물”들의 풍경을 그려나간다.

이처럼 부정적 정서와 실패의 풍경을 통해 믿음의 허구성을 찾아가는 시도가 흥미로운 이유는 사회적으로 합의된 의미의 재생산과 행동의 관성에 틈을 내는 효과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화면과 서사 내에서 일상의 사회문화적 형상들과 인간의 근본적 결여의 감정이 병치된 쓸쓸한 풍경은 맹목적인 믿음의 경로로 대리물들을 소비하는 의미의 고립을 깨닫게 한다. 그리고 이는 그러한 의미와 행동을 유통시키는 폐쇄회로로부터 이탈을 예비하기 위한 통찰로 이어질 수 있다. 이렇게 불안이라는 것이 틈과 균열의 가능성을 가진 것이라면, 앞서 그것을 부정적인 정서라고 말한 것은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있다. 그것은 긍정과 부정의 구분을 넘어서는, 가능성과 능동적 효과를 탑재한 하나의 감정이자 정서일 수 있다.

불안함, 모호함, 공허함은 그 자체로 인간의 한 정서이다. 그의 작업과 함께 정서의 교차와 의미의 전치가 일어나는 가운데 윤대희가 관심을 두고 직시하고자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작동인 것 같다. 그가 구성한 세계에 거주하는 캐릭터가 있다면, 아마도 그는 불안의 감정에 취약하고 민감한 탓에 그 감정을 무시할 수 없으면서도 거기에 매몰되거나 휘둘리지 않으려고 용기를 내어 그 실체를 의심하는 인물일 것이다. 이는 작지만 강렬한 작업 <keeper>(2021)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이 그림은 1981년 영화 <깊은 밤 갑자기>에 나오는 주인공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다. 이 주인공은 눈에 보이는 실체는 없지만 자신을 괴롭히는 악령으로부터 집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으로 사투를 벌이는 여인이다. 윤대희의 화면으로 들어온 여인의 꼿꼿하고 결연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 귀신과 싸워 집을 지켜내야 한다는 (영화 속 여인의) 신념과, 그가 싸우는 귀신의 실체가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영화 밖 관객의) 의심이 팽팽하게 대결하고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

회피하지 않고 휘둘리지 않고 실체를 의심하는 자에게 불안과 공허는 두려움의 대상만은 아닐 것이다. 전시는 불안이 머무는 공간으로 안내한다. 전시장 중앙에 설치된 <제목없는 드로잉>(2021)은 비닐 위에 드로잉을 하고 그 비닐들을 촘촘한 간격으로 배치한 작업이다. 비닐에 그려진 드로잉의 이미지를 보려 하지만 비닐 간 간격이 좁아서 그 형태와 이미지를 명확히 파악할 수 없다.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시야를 가리도록 반투명 비닐 소재를 활용했고, 안쪽에 이미지들이 있지만 서로 겹치고 중첩되어 그 형태가 제대로 보이지 않도록 연출했다. 융기는 보이지 않는 깊고 나지막한 곳에서 도래한다. 안개 지대와 같은 이 공간은 불안이 드리워진 공간이자, 동시에 여러 목소리가 꿈틀거리는 잠재의 공간, 융기의 도래를 앞둔 나지막하고 깊은 긴장의 공간일 수 있다.

다시, 전시는 불완전한 존재가 거주하는 풍경으로 안내한다. <믿음의 풍경>(2021)은 세 명의 인물이 뒷모습을 보이면서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는 풍경을 보여준다. 맹목적으로 걸어가고 있는 세 명의 인물은 <혼란 속의 형제들>(2021)의 미지의 공간에서 다시 등장한다. 안개와 연기가 느리게 피어오르는 공간에서 빠른 속도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듯한 에너지를 발산하고, 세 개의 캔버스의 상승하는 위치와 벡터 에너지가 역동성을 더한다.

윤대희가 일상에서 기록한 불안의 증거들과 그것들과 마주하는 인간의 이미지로 구성된 전시장에서 마음의 동요 혹은 울림을 느꼈다면, 그것은 깊은 곳 잠자고 있던 낭만주의적 심지가 진동한 것일지도 모른다. 낭만주의적이라는 것을 개념적으로 풀이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 윤대희의 작업을 경유하면서 그것을 나름의 비유로 설명하자면, 평평하지만 갑자기 도드라지는 융기의 순간이 도래할 것 같은, 혹은 안개와 연기가 피어오르는 느린 움직임을 헤치며 더 깊은 곳으로 거친 호흡과 함께 빠르게 걸음을 내딛는 것 같은 느낌이다.

안개와 연기는 앞이 보이지 않고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물질적․환경적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불안에 대한 은유이며, 불완전한 존재와 본질적 결여라는 근본적 조건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안개와 연기의 이미지와 함께 윤대희가 들려주는 불안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뜻하지 않게 그것이 순기능을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순기능은 새삼스러운 깨달음과 용기와 관련된 것이다. 생이 다할 때까지 불안을 떨쳐낼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과 함께, 새삼 분명해 지는 것이 있다. 그것은 가능성과 여지가 불안으로부터, 불완전으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바로 안개가 드리워지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으로부터.


 




안개 속의 풍경  
 

김홍기(미술평론가)


불안은 짙은 안개 속에서 겪게 되는 감정과 같다. 불안은 사방에서 우리를 위협하고 옥죄는 듯하지만 아무것도 아니고 어디에도 없는 것에 대한 감정이다. 하이데거는 불안과 공포를 구별한다. 공포는 언제나 어떤 규정된 외부대상에 대해서 느끼는 두려움의 감정인 반면, 불안은 특정한 대상 없이 생겨나는 낯선 감정이라는 것이다. 공포는 그 대상을 제거하거나 하다못해 짐짓 외면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는 감정이지만, 불안은 애초부터 아무것도 아니고 어디에도 없는 것에서 기인한 감정이기에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근본적인 감정이다. 불안은 윤곽이 뚜렷한 형상보다는 정확히 형용할 수 없는 색조에 가깝다. 또는 아예 시각이 배제된 기괴한 음조에 가깝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리 귀를 틀어막아도 소용없는 지독한 이명에 가까운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불안의 감정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불안을 어떤 특정한 대상에 대한 공포로 자꾸 치환하려 든다. 불안이라는 인간의 근본 감정을 공포라는 부차적인 감정으로 기꺼이(!) 오인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근본 감정과 직면하기를 한사코 보류하는 것이다. 이런 자기기만에 맞서 불안을 직시하려는 작가 중의 한 명이 윤대희다.

2014년 이후로 윤대희는 줄곧 불안이라는 주제에 매달려 왔다. 회화와 드로잉을 막론하고 그의 작품 속 존재자들은 하나같이 집 밖을 떠돈다. 간혹 임의의 실내 공간에 머물러 있기도 하지만 그곳은 안온한 도피처를 상징하는 집의 모습과는 거리가 한참 멀어 보인다. 그들은 결코 집 안에 안주하지 못한다. 심지어 돌아갈 집 자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 ‘홈리스’가 내던져진 집 밖의 세계는 어떠한가? 그곳은 거리도 아니고 광장도 아니다. 그곳은 그 어디도 아니다. 장소가 되지 못한 텅 빈 공간일 따름이다. 집 없는 인간이 깊은 밤 안개 속에 내던져진 형국이다. 윤대희가 그리는 집 밖의 세계는 그저 아무것도 아닌 공간이다. 그리고 그 무(無)의 공간에서 특정할 수 없는 불안의 정조가 자라난다. 그렇다, 자라난다. 딱히 규정되지 않은, 차라리 아무것도 아닌 불안의 정조가 자라난다. 윤대희의 그림에서 그 정조는 때로는 기괴한 식물의 형상을, 때로는 느닷없는 뿔의 형상을, 가장 최근에는 덩그러니 놓인 돌탑이나 정체를 알 수 없는 덩어리의 형상을 빌려서 나타난다. 가시가 돋친 음산한 느낌의 식물, 저주의 몫이 솟아난 듯한 그로테스크한 뿔, 간절한 소망으로 쌓아올려 오히려 불안을 방증하는 듯한 돌탑, 뭔지 모를 불길한 기운을 지닌 덩어리가 모두 불안 감정을 은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형상들 그 자체에 불안 감정의 본질이 담긴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불안이란 아무것도 아니고 어디에도 없는 것에서 생겨나는 감정이기에 정확하게 규정된 대상으로는 직접적으로 표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형상들이 간접적인 방식으로나마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바로 ‘자라난다’는 현상이다. 즉 불안이라는 감정, 이 실체 없는 감정이 가중되는 현상이다. 물론 음산한 잎사귀를 틔우는 것은 식물이고, 가차 없이 솟아나는 것은 뿔이고, 아슬아슬하게 높아져 가는 것은 돌탑이고, 계속 몸집을 불리는 것은 덩어리이다. 그러나 불안과 관련하여 우리는 식물, 뿔, 돌탑, 덩어리 같은 주어를 생략한 채 외따로 쓰인 ‘자라난다’라는 동사를 떠올려야 한다. 윤대희의 몇몇 드로잉의 제목인 <자라난다>는 주어가 누락된 불완전한 문장이 아니다. 그 자체로 충족적인 불안의 명제다. 또는 더 정확한 명제로는 윤대희의 또 다른 대형 드로잉의 제목 <자라난다자라난다자라난다>를 들 수 있다. 주어 없는 두려운 움직임이 야기하는 불안은 띄어쓰기 없이 나열된 동사가 보여주는 것처럼 빠져나갈 도리가 없는 옥죄임의 감정이기 때문이다.

애석하게도 주어 없는 동사를 그린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그 누구도 체셔 고양이가 사라지면서 남긴 웃음을 그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얼굴 없는 웃음을 그릴 수 없는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자라남을 화면 위에 펼쳐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윤대희는 우회의 전략을 구사한다. 즉 불안 감정 자체가 아니라 그 감정에 사로잡힌 자아가 세계와 조우하는 풍경을 그리는 것이다. 안개 그 자체가 아니라 자아가 목격하는 ‘안개 속의 풍경’을 그리는 것이다. 안개 속에서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순간을 화면에 옮기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략을 구사할 때에도 언제나 방점은 어떻게 우회적으로라도 ‘안개’ 즉 ‘불안’을 시각화할 수 있느냐에 놓여야 한다. 실체가 없는 안개, 즉 불안 그 자체를 형상화하는 게 원리상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그것을 고집스럽게 추구하는 것은 예술의 고유한 자유이자 권리이지 않은가. 그 불가능으로 다가서기 위해 윤대희가 선택한 변화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그는 회화와 드로잉을 병행해 왔으나 최근에는 드로잉에 전념하는 태도를 보인다. 2016년에 열린 세 번째 개인전에서 선보인 작업들은 모두 종이 위에 목탄으로 그린 드로잉이었다. 이것은 작품의 구성 요소에서 채도를 제거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명도만으로 작품을 구성함으로써 짙음과 옅음을 오가는 선으로 불안의 정조를 화면에 채워 나간다. 옅은 명도의 목탄으로 수차례 덧칠한 화면은 자욱한 안개 속을 연상시키고, 짙은 명도의 목탄으로 빽빽이 채운 화면은 칠흑 같은 어둠 속과도 같다. 더군다나 작가는 목탄으로 어떤 형상의 윤곽선을 정확하게 표현하기는커녕 손으로 문질러서 뚜렷하게 포착되지 않는 무정형의 분위기로 작품 전체를 채운다. 그는 이따금 작품의 공간을 <섬>이나 <그림자숲>이라고 명명한다. 이때 섬이든 숲이든 상관없이 그곳은 어떤 특정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불안 감정에 의해 내던져진 텅 빈 세계의 다른 이름이다.

다음으로, 윤대희의 작업은 불안의 인물화에서 점차 불안의 풍경화로 이행해 왔다. 2014년에 열린 그의 첫 번째 개인전에서 선보인 작품들을 보면 화면의 대부분을 인물의 형상이 채운 경우가 다반사다. 전신을 그리든 상반신을 그리든 얼굴만을 그리든 화면에서 인체의 형상이 차지하는 비율이 압도적이었다. 형상이 비대해지고 강조될수록 배경은 더욱 협소해지고 후퇴할 수밖에 없다. 이렇듯 2014년의 드로잉과 회화가 안개 속의 ‘자아’에 집중했다고 한다면, 그 이후의 작업들은 오로지 종이 위에 목탄만을 가지고 안개 속의 ‘풍경’을 그려내기 시작한다. 형상보다 배경이 강조되기 시작한 것이다. 인체의 형상이 눈에 띄게 축소되기 시작하고, 그 형상이 내던져진 세계의 풍경은 점점 더 큰 지분을 얻는다. 불안을 야기하는 안개가 자욱한 텅 빈 세계가 그만큼 더욱 강조되는 것이다.

끝으로, 윤대희의 작업 속에서 불안을 겪는 인간 형상이 분열의 양상에서 고립의 양상으로 변해간다. 불안을 다루는 그의 초기 작업을 보면 화면 속 인물들이 하나같이 분열의 상황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의 신체에 여러 개의 얼굴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드로잉, 수많은 균열로 왜곡된 얼굴을 그린 드로잉, 하나의 얼굴 안에 여러 작은 얼굴들이 박혀 있는 회화, 하나의 신체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유기적이거나 비유기적인 대상들이 보철처럼 들러붙어 있는 회화 등이 이 시기의 작업을 대표하는 이미지들이었다. 그러나 불안은 인간을 분열시키기보다는 고립시킨다. 무(無)의 세계에 내던져져 오로지 자기 자신과 대면한 인간은 분열이 아니라 고립을 겪는 것이다. 윤대희가 회화를 접고 드로잉에 매진하게 된 계기도 이런 깨달음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회화의 다양한 색채가 분열의 주체를 드러내기에 적합한 반면, 고립의 주체를 표현하기엔 무채색의 드로잉이 더욱 어울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의 드로잉 속 인물은 단순해지고 텅 빈 무표정한 얼굴로 제시된다.

요컨대 윤대희는 불안과 고립의 세계를 목탄 드로잉으로 그려낸다. 그의 작업은 곧 그가 자기 자신과 부단히 대면하는 과정과 같다. 그러나 그가 기꺼이 떠맡는 고립이 결코 자폐적이지 않은 까닭은 그 고립을 이끌어내는 불안이라는 감정이 인간의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감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두 텅 빈 세계 속에 내던져진 듯한 감정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가? 최근 윤대희는 자신의 경험에 더욱 충실한 불안의 풍경을 그려내려 한다. 이때의 경험이란 의식적, 무의식적, 신체적 경험을 모두 아우르는 것이다. 불면의 경험(<불면의 밤>), 그러다가 토막 같은 잠을 청하는 와중에 찾아온 불안한 꿈의 경험(<그날 밤> 연작), 불안에 사로잡힌 결과로 발생하는 신체의 징후(<몇 움큼의 덩어리>) 등이 그의 드로잉의 내용이 된다. 불안의 세계의 풍경은 동시에 내면의 풍경이자 더 나아가 내장의 풍경이기도 한 것이다. 인간의 근본 감정에 대한 윤대희의 예술적 탐구는 이제 곧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는 불면을 견디고 불안을 감내하며 끝내 가닿을 수 있는 데까지 걸음을 내딛을 것이다. 안개 속을 헤치며.




Landscape
Inside the Fog

Kim Hongki
(Art Critic)


Anxiety is like what one feels inside the fog. Anxiety seems to threaten and strangle us from all sides, but it is in fact a sentiment toward something that is not anything nor is anywhere. Heidegger distinguishes anxiety from fear. While fear is something we feel toward a defined outside object, anxiety is an alien sentiment bereft of any specific object. Fear can be overcome by eliminating or even pretending to avoid the object, but anxiety is a fundamental sentiment that cannot be cured from, as it is founded upon nothing that exists nowhere. Anxiety is closer to a non-describable color than a form of clear silhouette. Or, it is closer to a peculiar sound bereft of any visual element. In more precise terms, it is like a dreadful ringing in the ears that cannot be chased away, no matter how hard we cover our ears. Most people cannot stand the status of being anxious. Thus, they repeatedly seek to substitute anxiety with fear toward a specific object. They willingly(!) misunderstand the fundamental sentiment of anxiety as the secondary sentiment of fear. They postpone the moment of facing their fundamental sentiment. Yoon Daehee seeks to stand against such self-deceit and face anxiety.

Since 2014, Yoon has concentrated on the subject of anxiety. Be it painting or drawing, all the beings inside his works roam outside their homes. Occasionally some would stay inside an arbitrary space, but even such spaces seem very distant from being a house that represents safe refuge. They can never settle for being inside the house. In fact, it seems they do not have a house to return to. What is the world like outside the house, to which the “homeless” has been thrown out? It is neither the streets nor the plaza. It is nowhere. It is an empty space that has not become a place. A homeless man has been thrown out into the thick fog of the night. The world outside home that Yoon paints is a space that is nothing. And in this space of nothingness, the indefinable sentiment of anxiety is cultivated. Yes, it grows. This undefined, or better yet, this nothing sentiment of anxiety grows. In Yoon’s paintings, the sentiment dons the form of an eccentric plant, unexpected horn, and most recently, a stone pagoda or indefinable mass. A spooky plant with thorns, a grotesque horn that seems as if the product of curse has risen, a stone pagoda built in great earnest and thus in reverse proving the existence of anxiety, and a mass that is somewhat ominous are all metaphors for anxiety.

But these forms do not embrace the essence of anxiety. As mentioned earlier, because anxiety is nothing and stems from something that exists nowhere, it cannot be directly expressed through a specifically defined object. What these forms present in common, albeit indirectly, is the phenomenon of “growing”. In other words, the phenomenon of anxiety, this unsubstantial sentiment accelerating. Of course, what sprouts spooky leaves is the plant, what rises boldly is the horn, what precariously gets higher is the stone pagoda, and what gets bigger in size is the mass. But in relation to anxiety we should omit the subjects of plant, horn, pagoda, or mass, and think of the verb “grow” in isolation. “Grow”, the tile for some of Yoon’s drawings, is not an incomplete sentence that is missing its subject. It is by itself a sufficient thesis for anxiety. Even a clearer thesis would be the title for another grand-scale drawing, GrowGrowGrow. Just as the verbs repeated without any space in between conveys, the anxiety created by the subject-less fearful movement is a feeling of strangulation from which there is no escape.

Unfortunately, it is impossible to paint a subject-less verb. Just as no one can paint the smile that the Cheshire cat left as he vanished. Just as a face-less smile cannot be painted, a nothing-growth cannot be portrayed on the canvas. Thus, Yoon takes a detour. He does paint the anxiety itself, but instead paints the landscape of the self who is consumed by that sentiment. It is not the fog that he paints, but the “landscape inside the fog” witnessed by the self. He paints the moment that the man faces himself inside the fog. The important point when employing such tactics should be focused on how the “fog”, or the “anxiety”, could be visualized, albeit indirectly. Although it is theoretically impossible to visualize the substance-less fog, or anxiety itself, it is art’s innate right and freedom to persistently pursue it. In pursuing this impossibility, the following has been Yoon’s course of action.

First, while has worked on both painting and drawing, he recently tuned his focus onto drawing. All the works presented at his third exhibition, which opened in 2016, were drawings with charcoal on paper. Composing his art with only brightness, the filled the canvas with the sentiment of anxiety through lines that go back and forth dark and light. The screen with multiple layers of light charcoal is reminiscent of the insides of thick fog, while the screen densely filled with dark charcoal is like the insides of pitch-black darkness. Furthermore, rather than portraying the clear silhouette of any form, he smudges with his fingers and fills the art with the ambience of informel that cannot be clearly captured. He sometimes names the space of his art as Island or Shadow Forest. Whether it be an island or a forest, the name does not refer to any specific place, but is yet another name for the empty world that the artist has been thrown into by his anxiety.

Next, Yoon’s works have slowly shifted from figure paintings of anxiety to landscapes of anxiety. The works presented at his first solo exhibition in 2014 were mostly of figure forms. Whether they were painted full bodies or the upper body or just the face, the human figure took up the majority of the screen. As the figure became larger and was more accentuated, the background got smaller and could not but retreat. As such, while Yoon’s paintings and drawings of the year 2014 focused on the “self” inside the fog, his later works started to portray the “landscape” inside the fog with only charcoal on paper. More emphasis was on background than on form. The human form started to be minimized, and more share of the screen was presented to the landscape of the world that the human form was thrown into. More emphasis was put on the empty world filled with the fog that creates anxiety.

Finally, the human figures that suffer from anxiety in Yoon’s works shifted from being in the status of schism to the status of isolation. Looking at his early works on anxiety, all the figures portrayed were in status of schism. A drawing with numerous faces pasted on one body, a drawing of a face distorted with numerous divisions, a painting of a face in which numerous smaller faces were embedded, or a painting of a body on which indefinable (in)organic objects were stuck as if supplements. Such were the representative images of his early days. However, anxiety isolates rather than divides the humans. A man who is thrown into the world of nothingness and made to face only himself suffers from isolation, not schism. Yoon’s choice to quit painting and focus on drawing would not be irrelevant to such enlightenment. Whereas the various colors of painting are appropriate for portraying the subject of schism, monochrome drawings would be the more fitting medium for conveying the subject of isolation. Thus, the figures inside his drawings got simpler and are presented with empty and expressionless faces.

In sum, Yoon portrays the world of anxiety and isolation with charcoal drawings. His work is like the process of him diligently facing himself. But his willing isolation is not autistic because the sentiment that draws that isolation, anxiety, is a universal and fundamental sentiment for human beings. Do we not all share the sentiment of having been thrown into an empty world? Recently, Yoon seeks to draw landscapes of anxiety that are more true to his own experiences. The experiences here encompass everything from conscious and unconscious to physical experiences. Experience of insomnia (Night of Insomnia), and the experience of anxious dreams that came to him during the short terms of sleep (That Night series), or physical symptoms that come from being possessed by anxiety (Several Masses) all become the contents of his drawings. The landscape of the world of anxiety is a landscape of the inner side and is furthermore a landscape of the intestines. Yoon’s artistic investigation of the human’s fundamental sentiment has only just started. He will keep on walking, enduring his insomnia and anxiety, to as far as possible. Waving off the fog.